짧지만 강렬했던 생애 동안 예술로 삶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가 노아 데이비스의 독일 첫 회고전이자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 전시인 &lt;Noah Davis&gt;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DAS 민스크 쿤스트하우스(DAS MINSK Kunsthaus)에서 열리고 있다.

&ldquo;일단 에덴 동산을 나오고 나면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인 것 같다. 그곳을 기억하거나, 아니면 잊거나. 기억하는 데에는 힘이 들고, 잊는 데에는 또 다른 종류의 힘이 들며, 둘 다 하려면 영웅적인 힘이 필요하다. 기억하는 사람은 순수의 죽음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그 고통 때문에 광기에 빠져들고, 잊어버리는 사람은 또 다른 종류의 광기-고통을 부정하고 순수를 증오하는 광기에 빠져들고야 만다. 이 세상은 기억하는 광인과 잊어 버리는 광인으로 크게 나뉘고, 영웅은 드물다.&rdquo; -제임스 볼드윈, &lt;조반니의 방&gt;
 AN INSPIRING ARTIST 2015년 8월 29일. 예술가 노아 데이비스(Noah Davis)가 세상을 떠났다. 전도유망한 젊은 예술가는 고작 32세에 불과했다. 1983년 시애틀에서 태어난 데이비스는 10대 시절부터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려 작업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뉴욕 쿠퍼 유니언에 입학했지만 2004년 학교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마크 로스코부터 마를린 뒤마, 케리 제임스마셜에 이르는 화가들을 흠모했던 그는 미술사에서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다양한 화풍을 실험했다. 데이비스의 그림에는 평범한 사람, 일상적 장면이 담겨 있다. 굳이 눈에 띄는 점을 꼽자면 인물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 정도. 그는 미국 사회에서 대중이 지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일상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ldquo;내 그림은 그림 속 인물과 매우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람들도 각 작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가져가면서 이렇게 읽었으면 좋겠다&rdquo;는 그의 말처럼 데이비스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표현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플리 마켓, 개인적 아카이브, 영화, 텔레비전, 음악, 문학, 미술사 등 광범위한 카테고리에서 익명의 사진을 찾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했다. 데이비스가 그린 인물들은 잠을 자고, 춤을 추거나, 우두커니 서 있거나 혹은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렇지만 그는&nbsp; 마냥 현실에 침잠하기보다는 그림을 통해 자신만의 우주를 자유롭게 창조하고자 했다. &ldquo;나는 감상적인 낭만주의자에 가깝다&rdquo;며 자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환상적인 요소는 &ldquo;예술 이론의 제약이나 주문을 깨고,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 같다&rdquo;고 고백 했던 데이비스. 그의 그림은 현실적이면서 몽환적이고, 명랑하면서도 묘한 우울감을 내뿜는다. 어쩌면 그가 관심 있었던 것은 그토록 인간적인 삶 자체였으리라. 인간적이고 실존적이며, 보편적인 층위의 주제를 발견하고, 건져낸 것은 자신 주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림 속 인물의 몸짓, 눈빛, 각도 등은 불안과 고독, 천진함, 희미한 기쁨 등을 자아내며 그림을 보는 이들을 끌어당긴다. 아련하게 퍼져 나가는 색채는 자칫 예민하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각을 신비로운 분위기로 치환한다. &lsquo;흑인성&rsquo;이라는 좁은 표현으로 가두지 않아도 데이비스의 그림은 시간을 멈춘 듯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특별한 정서를 담고 있다.
UNDERGROUND MUSEUM &ldquo;궁극적으로 나는 사람들이 예술을 보는 방식, 사람들이 예술품을 구매하는 방식, 예술품을 만드는 방식을 바꾸고 싶다. 나는 항상 예술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예술에 확신이 없는 사람들, 더 구체적으로는 내 예술적 목표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이론 안에 너무 많은 것을 숨기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예술은 일상생활에서 기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흑인성을 초월해 모든 문화와 융합하고 영향을 미치는 예술적 유산을 위해 노력한다.&rdquo; 언더그라운드 뮤지엄(Underground Museum)의 웹사이트에 아로새겨진 데이비스의 선언이다. 2012년 데이비스는 아내 카론(Karon Davis), 영화 제작자이자 유명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 카릴 조지프(Kahlil Joseph)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알링턴 하이츠에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을 설립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라틴계 노동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뮤지엄 수준의 예술을 더 많은 이가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은 데이비스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자 그의 예술적 비전을 확장하는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네 개의 상점을 개조해 비영리 예술 및 문화 공간으로 운영하기위해 작가는 저명한 변호사였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기꺼이 쏟아부었다. &lsquo;우리 동네&rsquo;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예술을 관람하고, 예술을 통해 삶에 영감을 주고, 시민을 교육하고,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목표가 바로 데이비스 부부의 원동력이었다.

그들은 예술이야말로 활기차고, 정의롭고, 건강한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닌 지역 공동체의 예술적 허브 역할을 했다. 미술 전시뿐 아니라 영화 상영, 문학 낭독, 요가 및 명상 프로그램, 음악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어 예술이 특정한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신념을 설파했다. 설립 이래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은 아서 자파, 배리 젠킨스, 캐서린 오피, 한스 하케, 카라 워커, 로나 심슨 등 여러 예술가와 협업하며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예술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13년 데이비스는 &lt;Imitation of Wealth&gt;라는 전시를 기획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수준 높은 전시를 선보이기 위해 여러 미술관에 작품 대여를 신청하던 와중 어떤 기관도 자신들에게 실제 작품을 빌려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데이비스는 현대 걸작품을 직접 &lsquo;제작&rsquo;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르셀 뒤샹, 제프 쿤스, 온 카와라, 댄 플래빈 등 유명한작가들의 대표작을 거의 완벽하게 모사한 작품으로 채운 이 전시는 레디메이드의 개념을 모방해 &lsquo;도용&rsquo;, &lsquo;가치&rsquo;, &lsquo;진정성&rsquo;, 나아가 &lsquo;부&rsquo;와 &lsquo;계급&rsquo;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후 2014년, 드디어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과 협업 프로그램을 체결하며 수년간 7000여 점의 미술관 컬렉션을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에서 전시할 수 있게 된 기쁨도 잠시, 데이비스는 희귀암 판정을 받았다. 투병 중에도 그는 다수의 전시 기획에 열의를 보이며 일부 전시를 실행에 옮겼다. 당시MOCA 수석 큐레이터였던 헬렌 몰즈워스(Helen Molesworth)는 그와의 추억을 돌아보며 &ldquo;노아는 믿을 수 없을&nbsp; 도로 뛰어난 화가이자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온갖 역경을 딛고 그 꿈을 실현한 심오한 선구자라는 점에서 &lsquo;아티스트&rsquo;라는 용어를 가장 넓은 의미로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예술가다&rdquo;라고 회고한다. 노아 데이비스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아내가 운영을 이어갔으며,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은 지역사회와 전 세계의 예술인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극심한 경영난에 부딪혔고 몇 년 전부터 운영을 중단한 상황이다. 카론 데이비스는 &ldquo;언더그라운드의 운영은 멋진 여정이었지만 그만큼 고통스러웠다&rdquo;며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미술관의 문을 닫는다고 밝혔다.

SHOW MUST GO ON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DAS 민스크 쿤스트하우스(DAS MINSK Kunsthaus)에서는 노아 데이비스의 독일 첫 회고전이자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 전시인 &lt;Noah Davis&gt;가 열리고 있다. 연대기적으로 구성한 이번 전시는 2007년 그의 첫 전시를 시작으로 2015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에 걸친 데이비스의 멈출 줄 몰랐던 창의성과 호기심을 조명한다. 이를 위해 이전까지 공개된 적 없는 회화, 종이 작업, 조각 등 60여 점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설로 남은 2013년 전시&lt;Imitation of Wealth&gt;에서 선보였던 조각품도 다시 세상의 빛을 본다. 전시는 데이비스의 독특한 관점과 구상 회화의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강조한다. 그와 동시에 &ldquo;그의 모티브가 가까운 주변 환경을 끌어안음으로써 소위 미술사적 정본 혹은 규범(Canon)에서 벗어나고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rdquo;을 펼쳐 보인다.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그 어떤 &lsquo;주의&rsquo;에도 쉽게 속하지 않는 매혹적인 작품들은 &ldquo;현실과 마법의 중간 어딘가에 놓여있다.&rdquo; 따라서 이번 전시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엄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회적 예술 행위에 가려지기 쉬운 그의 그림이 지닌 미술사적 가치를 돌아보고, 회화에 접근하는 개념적 방식을 기린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때로 너무 진부하게 들린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유독 짧았던 생애를 떠올리면 그만큼 합당한 표현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예술 작품은 비록 그것을 남긴 이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 할지라도 여전히 많은 이에게 영감이 되고 놀라운 감동을 준다. 만약 그가 살아 있다면 어떤 행보로 우리를 놀라게 했을지, 어떤 그림으로 우리를 눈물짓거나 웃음 짓게 했을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별을 가릴지도 모르니, 해가 져도 울지 말라고 했던가. 서둘러 세상을 떠난 예술가의 운명 앞에서 상실을 아파하기보다는 그가 남긴 작품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음에 감사하면 어떨까. 2025년 1월 5일까지 열리는 전시 &lt;Noah Davis&gt;는 이후 런던 바비칸 센터와 로스앤젤레스 해머 미술관 순회전으로 이어진다.

Editor Lee Ga Jin

작업 중인 생전의 노아 데이비스. Los Angeles, 2009, ©The Estate of Noah Davis, Courtesy of The Estate of Noah Davis and David Zwirner, Photograph by Patrick O’Brien-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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