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처럼 희미하게 지워진 인물과 생생히 살아 있는 꽃밭으로 &lsquo;인간의 실존&rsquo;을 그리는, 화가 이재헌과의 인터뷰.

L'OFFICIEL (이하 LO) 화가 김종학은 설악산에서 사계를 그렸고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당신의 작업실이 위치한 제천은 어떤 고장인가? 그곳은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JAEHEON (이하 JH) 서울에서 살다가 큰 아이가 태어날 무렵 아내를 따 라 제천으로 내려왔다. 그 아이가 지금 12세가 됐다. 나는 작은 산골 마을 출신이다.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6학년 때 부모님과 떨어져 대도시로 유학을 갔다. 그래서인지 나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도시 모두에 익숙하면서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서울은 모든 면에서 거대했고, 나를 항상 압박했다. 제천에 내려올 무렵은 작업이 심각한 침체기에 빠진 시기로,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다. 그러다가 아내의 이직을 계기로 도피하듯이 제천으로 내려왔다. 제천은 적당한 크기의 도시이면서 자연과 도 가까운 곳 이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들판을 헤매듯 다니곤 했다. 들꽃들을 보았고 계절의 변화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LO 작업실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었으면 싶다. 작업실은 작가의 세계 그 자체 혹은 세계를 반영하거나 표현한다. 당신의 작업실은 어떤 모습인가? JH 나는 작업실에 누군가를 잘 초대하지 않는다. 내 작업실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이 곳에선 오직 그림만 생각한다. 먼지가 많이 쌓여 있고, 창의 절반은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있다. 그림을 기댈 수 있는 벽은 모두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연탄 난로가 있고, 물감 더미가 있다. 30대 에는 작업실이 유폐된 감옥 같다고 생각했는데 50대를 바라보는 지금은 안식처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여전히 낯섦이 불쑥불쑥 출몰하곤 한다. 
LO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다시 서양화를 전공했다. 독특한 이력이다. JH 가슴에 구멍이 뚫린 상태라고 해야 할지&hellip;. 어떤 이들은 이 말에 분명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막연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 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마 지금의 내 나이쯤일 텐데, 직장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기르고 그러다 문득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이 일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소질이 있었던 그림을 자연스럽게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다가 알 수 없는 몰입감을 느낀 후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4년 만의 개인전 <하얀 성>에서 전시한 <꽃밭(Garden)>과 <꽃밭 속의 형상(Figure in a Garden)>

LO 당신의 초기 작품 세계에서 아버지를 빼고 논할 수 있을까. 사고로 뇌를 다친 아버지의 모습이 당신의 작품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친 까닭은? JH 경상도 출신인 나는 아버지와 대화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들만의 침묵의 대화법이 있다. 그랬던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 일을 마치고 새벽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사고를 통해 아버지만이 아닌 우리 가족 모두가 어떤 극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뇌를 크게 다치신 아버지는 광인처럼 변하셨고 3개월동안 간병생활을 했던 나 역시 감정과 이성의 한계까지 밀려나야만 했다. 그때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대로 진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학업을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가 계신 병실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그만 무너지듯 울고 말았다. 나는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성의 울타리를 높이 짓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통해 경험한 나의 한계는 아버지의 사고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나를 다시 세우게 만들었다. 
LO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넘어 인간 삶의 부조리한 상황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아버지를 그린 작품을 통해 어떠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는가? JH 내 작품이 수렴하고 있는 인간과 이 세계의 조건은 사실 그림을 그리기 이전부터, 어쩌면 어린 나이에 느꼈던 상실감으로부터 시작해 서서히 나에게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말로는 잘 설명이 안 되는, 뭉텅이로 한꺼번에 들어오는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를 통해 타인을 향한 진정한 온기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LO 2013년경부터 &lt;꽃밭&gt;, &lt;꽃밭 속의 형상&gt;, &lt;뷰어&gt; 연작이 이어지고 있다.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이 연작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JH 그때가 제천으로 내려온 시점이다. 극심한 침체기 속에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거닐던 들판과 그곳에서 보았던 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물화가의 정체성을 지닌 내게 꽃 그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붓질을 다시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꽃을 그리면서 조금씩 붓질 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시에 그린 꽃은 잿빛 무덤 위에서 피어나는 그것이었다. 삶과 죽음의 에너지가 꽃과 인간의 형상으로 한 화면 속에 자연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LO 당신의 꽃밭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생명력이 넘치며, 다소 음울해 보인다. 왜 꽃밭인가? 그리고 당신이 그리는 꽃밭은 어떤 세계를 표현하는 것인가? JH 꽃밭은 완전한 자연도 아니며 그렇다고 인공의 정원도 아니다. 도시와 자연 모두에 익숙하면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나의 정체성과 닮아 있다.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울함은 도시와 인간의 것이고, 생명력은 자연의 것이다. 이 둘이 함께하는 풍경은 비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

LO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세대가 환호하는 뷰티 브랜드 탬버린즈가 삼청동에 새로운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면서 &lt;꽃밭 속의 형상&gt;을 구입해 걸었다. 탬버린즈는 당신의 그림이 그들의 브랜드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고 밝혔다. 작품이 걸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 그리고 작품이 걸린 결과에 대한 당신의 감상은? JH 작년 가을 한 아트 페어에서 전속 갤러리를 통해 만남이 이루어졌다. 탬버린즈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분명한 비전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가치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과정이 전부이지만 결과로 승부한다는 점에서 화가와 그들은 닮아있다. 자연스레 그들의 행보를 응원하게 되었다. 
LO &lt;아이돌&gt; 연작은 자화상 혹은 아버지를 그린 작품과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 맞는가? 그리고아이돌을 그리는 이유는? JH 당연하다. 아이돌은 성(聖)과 속(俗) 모두를 가지고 있다. 우상과 성상의 차이는 믿음의 방향에 있다.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는 이라면 예외 없이 신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의 이름이 신이든 대자연이든 초월의 영역과 맞닥뜨리게 된다. 나는 인간과 신이 서로 만나는 접촉면을 생각한다. 그곳에 위태롭게 서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한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노래하고 춤추는 이가 바로 내가 그리는 아이돌이다. 인간 일반이면서 동시에 소통할 수 없는 지극한 개인이 나의 아이돌이다. 
LO 2006년부터 자신이 원하는 형상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흐리기 기법으로 사라질 듯 희미한 형상을 만들어 존재의 유한성과 삶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법을 시도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영감을 받은 것인가? JH 대학원 시절이다. 그 무렵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게르하르트리히터의 흑백 그림을 보았다. 그 그림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림 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나는 그가 이룩한 인식의 전환을 알아봤고 어떻게든 나의 것으로 소화하기 시작했다. 내 그림의 계보로 설명하자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거부할 수 없는 실존의 폭력이 리히터를 거쳐 유령화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느끼는 이 시대의 실제감을 회화적 계보로 거슬러 올라가 연구하고 다시 지금 이곳으로 끌고 내려 오는 일이 바로 화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뷰어015(Viewer015)>, 2019-2022, Oil on Canvas, 190×150cm.

<아이돌(Idol)>, 2021-2022, Oil on Canvas, 33.2×24cm.

<뷰어014(Viewer014)>, 2019-2020, Oil on Canvas, 194×130cm.

LO 2022년, 4년 만에 개최한 개인전&lt;하얀 성&gt;은 제천에 자리한 작가의 작업실 근처 모텔에서 이름을 따왔다. 요란한 욕망으로 가득 차있는 반면 하얗게 텅 비어 있는 모습의 역설이 당신의 작업과 닿아 있어 그렇게 명명했다고 밝혔다. 가득 찬 욕망과 텅 비어있음. 이 역설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들려준다면? JH &lt;하얀 성&gt; 이전의 개인전이 &lt;밤의 진공&gt;이었다. &lt;밤의 진공&gt;이 내가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태도라면 &lt;하얀 성&gt;은 나의 세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lsquo;하얀&rsquo;은 색이라기보다 진공처럼 사라지고 무언가가 빠져 나가버린 상태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lsquo;성&rsquo;은 독립적인 동시에 고립된 나 자신이자 내가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어쩌면 진공 포장 속 한 인간으로 쌓아 올린 이 세계라는 성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LO &lt;하얀 성&gt;에서 발표한 작품들이 종교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JH 앞선 질문에서도 답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lsquo;왜 새로운 종교화는 그려지지 않는가?&rsquo;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그린 아이돌이 아이콘화가 되길 바란다. 이제 종교가 사라진 곳에 예술이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종말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를 구원할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구원이 아니라면 담담히 종말을 받아들이는 일이 예술이 되고 있다. 
LO &lt;형상&gt;시리즈에서는 인물이 분열하는 듯이 혹은 움직이는 듯이 중첩되게 표현했다. JH 나는 한 명을 그리다가 언젠가부터 두 명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존의 양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존이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단독자, 고독한 나를 극복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둘이면서 하나인, 하나이면서 둘인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둘이 그려진다면 셋은 자연스럽게 그려질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시대의 형상이면서 모습이다. 
LO 2023년 1월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를 통해 환상적 화면을 구축한 4인의 그룹전 &lt;Paraxis&gt;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인물은 뿌옇고 얇게, 꽃은 되직한 질감으로 선명하게 그리는 상반된 화법과 질감이 충돌하는 작품들로 주목 받았는데 이러한 표현법을 구사하는 까닭은? JH 형상은 윤곽선을 통해 배경과 분리된다. 바꾸어 말하면 윤곽선은 형상과 배경을 나누는 경계가 된다. 나는 그 경계를 지우고 다시 그리기도 하고, 붓질을 쌓아 올려 경계를 만들어나가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간의 형상은 전자의 방식으로, 꽃밭은 후자의 방식으로 주로 그려왔다. 흐려진 인간의 형상과 선명한 꽃밭이 한 화면 속에 그려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경계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인물이 형상이 되고 꽃밭은 배경이 된다. 최근에는 꽃밭이 형상이 되고 인물이 배경이 되기도 한다.

LO 당신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lsquo;인간의 탐구&rsquo;인가? 당신은 인간의 실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JH 그렇다. 그림을 그릴수록 두려움만 더 커진다. 이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 매번 텅 빈 구멍 속을 들여다보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그래서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화가의 삶을 일상의 삶과 더욱 가깝게 두려 한다. 내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전에 나는 어떤 인간인가가 있다. 마치 유령처럼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이 세계의 새로운 폭력이 인간의 형상으로, 자기 연민이 아닌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세워지도록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하고 싶다. 그 일 자체가 어쩌면 실존인지도 모르겠다. 
LO 예술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JH 한때 예술이 전위에 섰을 때가 있었다. 이제 예술은 후위에 서서 인간과 삶을 위로하며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시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언제나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끄트머리에 예술이 있어 낙오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그래서 후위가 휘어져 전위에 닿도록 하는 일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LO 18년간의 당신의 회화 세계를 스스로 정의 한다면? JH 지독하다. 
LO 가장 존경하는 혹은 애정 하는 예술가들을 꼽는다면? JH 나의 개인적 회화사를 구성하는 화가들의 계보를 언급할 수도 있지만, 이런 기회가 온다면 꼭 짚고 넘어 가야겠다고 다짐했던 화가가 있다. 지금은 서로 연락하지 않지만 오랜 시간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나눈 화가 이자영을 이야기 하고 싶다. 그 대화를 통해 내 인식의 영역이 확장되었 고 그림의 길이 외롭지 않았다. 나의 멘토이면서 화우(畵友)였던 이자영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언젠가 각자의 영역에서 만개하리라 생각하고 염원한다. 그리고 그가 위대한 화가가 되길 그 누구보다 응원하고 기원한다.

LO 최근 작품 활동 외에 당신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면? JH 안정적인 창작 활동에 필요한 환경에 관심이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의 응축된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작업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창작 환경에 더 관심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의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LO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작품을 소개한다. 아티스트에게 SNS란 무엇인가? JH 몇 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포트폴리오용 계정을 만들고 일정한 시간마다 그림을 올렸다. 얼마 전 팔로어 수가 만 명을 넘었다. 해외 컬렉터뿐만 아니라 여러 갤러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각자 계정을 사용하는 목적이 다를 테지만 공개된 아티스트 계정이라면 사생활보다는 작업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키우길 추천한다. 외롭고 지칠 때 수많은 &lsquo;좋아요&rsquo;가 도파민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술가는 본인의 작업이 우선이다. SNS는 플랫폼이지 콘텐츠가 아니다. SNS용 자아를 하나 따로 만들고 내 작품을 홍보하는 역할을 맡기라고 조언하고 싶다. 
LO 올해 혹은 이후의 계획은? JH 올해 9월에 전속 화랑인 갤러리 SP에서 개인전을 연다. 그리고 내년의 해외 개인전을 논의 중이다. 특히 앞으로 몇 년동안은 해외 전시를 비중 있게 다룰 생각이다.

editor Lee Ga Jin photographs GALLERY SP

만개한 꽃밭을 배경으로 삶의 부조리를 그리는 화가 이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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