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루클린 기반의 예술가 마리아 베리오는 그녀의 캔버스를 통해 현실 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와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예술가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짐작하곤 한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태어나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리아 베리오(Mar&iacute;a Berr&iacute;o)는 신화, 역사, 현실, 개인적 경험을 조합한다. 수채 물감과 일본 전통 종이를 활용한 콜라주로 완성한 섬세함과 화려함, 아련한 색채와 질감이 돋보이는 베리오의 캔버스는 아름답지만 의미심장하다. 여성과 어린이가 주요하게 등장하고, 인간과 동식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장면은 몽환적이며 경계 바깥의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하되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그 안에 우리를 둘러싼 현실 세계의 정치와 국제 환경, 사회적 현상과 소외된 이들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구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듯 단단한 얼굴로 화면 바깥을 응시하는 인물들을 앞세워 베리오의 예술은 회복력과 포용의 힘, 이해와 치유를 촉구하는 특유의 호소력을 발휘한다. 조심스레 그들에게 손을 내밀자 마리아 베리오가 그림 너머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L'OFFICIEL (이하 LO)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기 시작한 순간을 기억하는지, 현재의 당신은 그때 꿈꾸던 바로 그 예술가인지 궁금하다. Mar&iacute;a Berr&iacute;o (이하 MB) 내 꿈은 처음 연필을 잡을 때부터 시작했다. 기억할 수 있는 한 언제나 화가를 꿈꿨다. 학교에서도 항상 앉아서 그림을 그렸는데, 정신없이 색칠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수업 시간에 쫓겨난 적이 있을 정도다. 한 번도 내 꿈을 놓지 않았고, 서서히 현실로 펼쳐졌다. 하지만 아직은 그때 꿈꾸던 예술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더 많은 실험과 학습을 통해 작업을 풍부하게 하고,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LO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개인적인 경험이나 기억은 무엇인가? 그것을 시각예술로 옮겨낼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MB 뉴욕으로 이주한 것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뉴욕에 오자마자 어지러울 정도의 자유로움에 사로잡혔다. 그 여운을 작품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나라로 이주해 이방인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매우 외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 나도 종종 그랬고, 예술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 지금은 친구도 생겼고 결혼도 했고 아들도 있으니 초창기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엄마가 된 것도 내 예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또 다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낳고 나니 감정의 깊이가 더 깊어지고, 어떤 면에선 오히려 연약해지기도 했으며, 더 큰 인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높아졌다. 이런 점을 그림에 담으려 하고 있다.
LO 본인이 태어난 땅, 콜롬비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MB 콜롬비아를 떠난 지 이미 20년이 넘었다. 내가 태어난 나라가 상상 속의 나라가 된 셈이다. 모든 기억이 그렇듯 내 기억도 신화와 환상으로 얼룩져있다. 머릿속에 있는 콜롬비아에 대한 이미지는 모두 지나간 시대에 멈춰버린 것으로, 실제 장소와는 거의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LO 그렇다면 현재 당신이 거주하는 뉴욕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MB 몇 년 전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영감을 주는 도시다. 뉴욕의 활기찬 에너지와 강렬함, 기능적인 혼돈을 좋아한다.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고 전 세계에서 온 흥미로운 사람들이 교류하는 것도 재미있다. 뉴욕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때문에 역사나 향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도 시다. 뉴요커들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에 접근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작품에 잘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LO 우리가 물리적으로 서로 먼 곳에 있지만 당신의 스튜디오 풍경과 일상이 어떨지 상상해보고 싶다. MB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면 걸어서 30분 거리에 작업실이 있다. 커다란 공업용 건물에 자리한 곳인데, 나만의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주로 커피를 내려 테이블 앞에 앉곤 한다. 테이블 위에는 종이 꾸러미, 물감과 연필, 사용한 면도날이 담긴 통, 접착제 통으로 가득하고 주변으로 캔버스 더미, 예술 서적이 꽂힌 책상, 파일 캐비닛이 보인다. 연작 작업 위주로 하기 때문에 보통 동시에 작업 중인 그림이 여러 점 있다.
LO 당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강하면서도 여려 보이고, 신비하지만 친근하고, 무심한 동시에 근면해 보인다. MB 그들은 내가 닮고 싶은 여성이거나 찬탄하는 자질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 때로 그들은 내가 끌어낸 감정 자체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나 우리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이 스칠 때도 있다. 이런 순간은 신비롭고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만 가끔은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캐릭터를 창조하는것은 관람자만큼이나 내게도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남들은 적어도 화가인 나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LO 화면 바깥으로 그림 속 주인공들의 인생이 이어진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 MB 항상 그렇다. 그림을 그릴 때는 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그 이야기를 채울 캐릭터를 구상한다. 그림이 진행됨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고, 인물을 그리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내면의 삶은 어떤지 더 많이 알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기본적인 윤곽은 항상 존재한다. 나는 그들의 세계로 이동하고, 종종 그들에 대한 꿈을 꾸고, 그들의 이야기가 내겐 거의 현실이 된다.

LO 작품 속에서는 인간과 자연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마치 신화 혹은 동화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듯하다.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나? MB 여러 신화, 전설,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실제로 참고하기도 하지만, 작품에서는 나만의 것을 창조하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최근에 완성한 시리즈 &lt;A Feast for Ammit&gt;은 사후 세계에 대한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믿음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고대 그리스 드라마,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삶과 작품, 그리고 유령, 예언, 집착에 관한 현대의 이야기와 결합했다.
LO 한국에도 수많은 신화, 설화, 전설 등이 있다. 당신의 그림을 보고 잊힌 이야기와 사람들이 떠올라 어쩐지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당신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편인가? 만약 그렇다면 요즘엔 어떤 것이 그립나? MB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세상의 많은 부분과 그것들이 작동하는 방식에 무지했던 내 어린 시절이 그립다. 예전의 나를 되돌아보면, 지금 내가 아는 것을 그때 알고 있었다면 당시의 시험을 겪어낼 힘을 똑같이 가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 커리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과 헌신, 노력 그리 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의 순진함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낙관주의도 한몫했을 테고.
LO 작품의 물리적인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일본 종이나 한지를 사용하게 된 계기가 있나? 새로운 재료의 도입이 콜라주라는 기법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MB 대학 시절 한 친구가 말하길, 내가 옷을 입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더라. 그 친구가 일본에서 온 종이를 보여줬다. 그 종이들은 환상적이었고, 별다른 효과를 계획하지 않은 채 그림 위에 콜라주 하기 시작했다. 그냥 실험한 거다. 처음에 했던 작품은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있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종이를 찢고 자르고, 맨손으로 풀을 바르면서 느껴지는 감촉이 정말 좋았다.
LO 이미지적으로는 섬세한 색채와 기법이 돋보이는데, 전체 작품이 워낙 커서 마법적인 효과가 배가되는 듯하다. MB 작품의 크기에 따라 물리적 감각이 달라진다. 작은 작품을 만들 때는 구석구석 만지고 다룰 수 있는 친밀한 느낌이 더 강하다. 큰 작품일수록 내가 느끼는 감각은 훨씬 육체적이다.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캔버스의 넓은 부분을 한 장의 종이로 덮어야 하는데, 넓은 면적에 접착제를 바르다 보면 어깨가 아플 때도 있다. 마치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예술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때로는 크기가 커야 마땅한 작품도 있다.
LO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드는 일이 어떤 즐거움을 주나? MB 시간이 걸리는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그림에 점점 더 빠져들면서 서서히 커지는 즐거움. 명상이나 황홀경 같은 상태에 빠져드는 것과 비슷해 결국에는 나 자신을 잊는다. 나의 자아와 주변 세상이 저 멀리 사라지고 오로지 작품과 대면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LO 그림 &lt;The Nightingale I&gt;에서는 왠지 모르게 클림트의 작품이 떠올랐다.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 예술가는 누구인가? MB 에드가 드가, 앙리 루소, 알베르토 자코메티, 메리 카사트, 케리 제임스 마셜, 디에고 리베라, 크리스 오필리, 파울라 레고, 앨리스 닐, 마리코 모리, 루이스 부르주아, 레메디오스 바로.
LO 예술에 지리적, 문화적 국경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고 믿나? MB 물론이다. 작품이 탄생한 문화, 환경 또는 역사적 시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감동을 받을 수 있지 않나. 지식은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예술 작품의 다양한 측면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만 어떤 작품이 보는 이에게 흥미를 유발하거나 감동을 줄 수만 있다면 그 작품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LO 그렇다면 당신의 작품이 국경을 넘어 아시아의 관람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원하나? MB 내 그림 자체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는 항상 국경을 초월하며, 모두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남미 출신 여성으로 북미에 거주 중인데, 유럽에 있는 갤러리와 주로 일한다. 작품의 주재료는 주로 일본과 한국에서 생산한 종이다. 이처럼 내 작품 하나하나가 글로벌한 힘과 아이디어의 혼합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만약 공예 전통이 없었다면, 수 세대에 걸친 아시아 종이 장인들의 천재성과 실험 정신, 수작업이 없었다면, 내 작품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LO 예술가로서 되뇌는 주문이나 다짐이 있다면? MB 과정을 믿고,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그 과정을 즐기자.
LO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하기에 더없이 좋은 봄이다. 2024년에 당신이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MB 무엇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바란다. 기후변화 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이 있기를 바란다. 스크린을 통한 연결은 줄고 사람 간의 연결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올해도 내가 계속 사랑할 수 있기를, 가장 가까운 사람 역시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Editor Lee Ga Jin.

María Berrío, <A Sunburst Restrained>, 2019, Collage with Japanese Paper and Watercolour Paint on Canvas, 152.4×182.9cm ©María Berrío. courtesy of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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